2017. 10. 11. 18:02ㆍ해외 여행
교토(京都)
닌나지(仁和寺)
헤이안시대 58대 고오고오(光孝)천황이 서산어원사(西山御願寺)를 건립하기로 발원하여 착공함
888년 59대 우다(宇多)천황이 선왕의 뜻을 받들어 완공하고
우다천황 퇴위후 출가하여 닌나지의 주지가 되어 30여년간 진언밀교를 수행함
그 후 메이지유신 때까지 황태자,황손이 주지를 이어받아 오무로의 황궁(御室御所)이라고 불리움
국보와 중요문화재 등 보물도 많이 보유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닌나지 정문인 니오몬(二王門) 중요문화재
닌나지 勅使門
닌나지 中門(중요문화재)
5층탑(중요문화재)
5층탑
닌나지 곤도(金堂) 국보
금당
종루
닌나지 어전 정원
약사여래를 모신 영명전(靈明殿)
료안지(龍安寺)
원래 도쿠다이지(德大寺) 가문의 별장이었으나 1450년 무로마치막부 실권자 간레이(管領)이었던
호소가와 카츠모토(細川勝元)에 의해 창건
(세계문화유산)
료안지 鏡容池
용안사 방장 정원인 石庭
정원안의 돌은 서쪽으로 7개,5개,3개씩 모두 15개가 놓여 있다
하얀 모래는 바다를 바위는 바다에 떠 있는 섬을 상징
즉 무한히 넓고 깊은 망망대해를 이미지화한 것임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15개의 돌을 한 번에 다 볼 수 없다
이 것은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선종의 정신을
은유적으로 기르치기 위한 것이라 함(팜프렛 설명)
담장은 기름을 입힌 황토벽으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기름이 베어나와 은은한 색상을 나타냄
2차 세계대전시 버마에 파견된 자동차공장 전몰자 위령비
용안사 산책로가 좋아요
킨카쿠지(金閣寺)
1397년 무로마치막부 3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퇴위후 생활을 위헤 기타야마덴(北山殿)을
건립한 것이 기원으로 사후 유언에 따라 사찰로 바뀜(鹿苑寺)
1950년 화재로 소실후 1987년 재건됨
기타야마 문화를 상징하는 건물로 요시미쓰 시대의 막부정치 중심지였음
금각은 3층 누각으로 전체가 금박으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1층은 호스이인(法水院)이라는 헤이안 시대의 건축 양식이고
2층은 초온도(潮音堂)라는 무사 취향의 양식이고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3층은 선종 양식인 비어 있는 선실(禪室)
지붕 위에는 황금의 봉황이 날개를 편 웅자한 모습이다(중국식)
이는 공가(孔家) 문화와 무가의 선종문화,중국문화를 융합한 것으로
요시미쓰의 권세와 그 성격을 말해준다고 함
비가 오는 날에도 인산인해라 우산에 가려 사진도 몇장 겨우 찍었어요
다이토쿠지(大德寺)
가마쿠라 말기 宗奉妙超(大燈國師)가 大德이라는 작은 암자를 개창
엄격한 宗風을 가진 宗奉의 학덕이 점차 세상에 알려져
95대 花園,96대 後醍醐 양 천황의 귀의로 勅願所(천황이 기원하는 곳)로 되고
1326년 법당이 완성되어 현재의 대덕사가 됨
20여개의 작은절이 모여 있음
대덕사 가는 길에 작은 신사가
대덕사 總門
三門(金毛閣)
대덕사 興臨院
興臨院
대덕사 서봉원(瑞峰院)의 獨坐庭
절 이름인 서봉을 테마로 한 봉래산식 정원
중국의 선승 百丈선사의 "獨坐大雄峰"이라는 禪語에 영감을 받아 독좌정이라고 함
이 가레산스이(枯山水)는 높고높은 봉래산으로부터 반도에 이르고 대해의 거친 파도를 맞더라도
꿋꿋하게 홀로 앉아 대자연을 느끼게 한다고 함(팜프렛에 설명)
일설에는 돌이 놓인 모습이 십자가 모형으로 설계자가 교인이었다는 말도 있음
서봉원 閑眠庭
왼쪽이 서봉원 方丈
이 방장 내부 벽화가 금강산 그림이 33폭이 연이어 있다는 데 몰랐어요
(팜프렛 소개에 세계적 명산으로 기록)
사이사이 아기자기한 정원이 많아요
대덕사 龍源院
이 바둑판이 풍신수길과 덕천가강이 대국한 것이라고 함
용원원 방장 앞 石庭
대덕사 용원원 龍吟庭
대덕사 앞길
고류지(廣隆寺)
스이코(推古)천황 11년(603년)에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573~621)가 건립했다고 전해짐
교토지방의 가장 오래된 사찰이며 성덕태자가 건립한 일본 7대 사원중 하나임
명칭은 蜂岡寺,秦公寺,太秦寺 등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廣隆寺로 불리움
신영보전(新霊寶殿)에 아스카(飛鳥)시대(552~645)에 만들어진
목조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국보1호로 보관되어 있음
일본서기에 따르면 광륭사는 하타노 가와가츠(秦河乘)이 성덕태자로부터 불상을 하사받아
이의 봉안을 위해 건립하고 이 불상이 현존하는 미륵보살이라고 광륭사의 기록에 있음
또 일본서기에는 진씨 가문이 대거 일본에 도래한 것은 15대 오진(應神)천황 16년으로
주로 양잠직물을 업으로 하고 그 외에 대륙이나 반도의 선진 문화를 수입하도록 노력해서
농경,양조 등 당시의 지방 산업의 발달에 공헌했다고 함
太秦의 광륭사는 중생 제도의 길을 탐구하고 불법에의 절대적 귀의로 평화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자비의 화신인 성덕태자의 이상의 실현에 힘쓴 진씨의 공적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이고
신앙과 예술의 아름다운 조화와 민족의 귀한 융화협조를 여실히 말하는 일본 문화의 일대 보고이다
위는 광륭사에서 주는 팜프렛에 있는 내용임
우리나라에서는 진하승은 당시 실력자인 신라계 하타(秦氏) 가문으로 보고 있음
(일본 일부에서는 중국 진시황의 후손이라고 보는 이도 있음)
성덕태자가 입멸하자 신라 진평왕이 그를 애도하여 불상과 금탑,사리를 보냄
금탑과 사리는 오사카 四天王寺에 봉안하고
赤松으로 제작된 불상은 광륭사에 모신 것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고 봄
우리나라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너무 같아 쌍둥이 불상으로 보임
광륭사 靈寶殿 중앙에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 여래형미륵보살(백제전래),
아미타여래좌상,十一面千手觀音像,千手觀音坐像 등 31구가 있음
그 중에 진하승과 그 부인의 목상도 있음
광륭사는 다분히 신라적인데 고구려와 백제적인 성향도 함축하고 있다고 함
일본의 학자는 한국에 없는 적송이라 일본에서 만들어 졌다고 하고
다른 학자는 당시에 한국에 적송이 없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함
왼쪽이 한국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오른쪽이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광륭사 가는 길
광륭사 樓門
일본 국보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부분이 정문 옆에 사진으로 있네요
대웅전에 해당하는 上宮王院 太子殿에 33세 무렵의 목조 태자상이 안치
광륭사 2층 樓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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