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8~10,12 일본기차여행 14 - 사찰,신사,역사유적지 7

2017. 10. 10. 14:40해외 여행


나라(奈良)

고후쿠지(興福寺)

710년 당시 세력가였던 후지와라 가문의 개인 사찰로 

원래는 170여개의 건물이 있던 대사찰이었으나 전란과 화재로 현재는 10여개만 남아 있다

730년에 건립된후 수차례의 전소로 1426년에 재건된 5층탑은 높이 50.8m로

에도 시대 이전에 지은 탑 중에서 교토 도지(東寺)의 5층탑 다음으로 높다




도콘도(東金堂)과 5층탑 (모두 국보)


도다이지(東大寺)

호류지(法隆寺)와 함께 나라의 양대 사찰로 백제계인 료벤(良弁)스님이 창건

745~749년 대불전이 완공

748년에 산가츠도(三月堂 法華堂)이 먼저 완공


동대사앞 상가에 사슴들이 돌아다녀요

(이 사진 찍으려고 돌아선 사이 자전거 바구니에 있던 나라 지도를 물고 도망가며 먹어버렸어요) 


난다이몬(南大門)은 가마쿠라 시대에 인도 양식으로 재건된 높이 25m의 건물

좌우에 높이 8.4m의 금강역사상은 1203년에 가마쿠라 시대 대표적 조각가인

운케이(運慶)와 카이케이(快慶)가 불사 20명과 함께 75일만에 완성한 것이라 함

남대문 양쪽에는 고마이누(貊犬 고구려개)상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아 자르다 보니 안 찍혔어요



경내에도 사슴들이 돌아다녀요

대불전으로 신라 건축가 이나베노모모요(猪名部百也) 752년 완공함

대불전안에는 거대한 불상이 안치됨

대불전은 1195년에 중건되었다 1709년 일본식으로 재건되며 옛모습이 사라졌다고 함

재건된 건물은 원래의 3분의 2에 불과하나 현재까지 목조 건물로는 세계 최대 규모임



이 불상은 백제 멸망후 이주한 백제왕 敬服이 황금 900냥을 시주하여

백제인 佛母匠 군나카노기미마로(國中公麻呂)가 749년 주조함

1180년 화재후 1185년 재현되나 백제 조각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일본 사람을 닮은 투박한 모습이라 대불이 제 모습을 잃었다고 함




원래 모습의 동대사 모형


대불전안의 나무기둥 구멍을 통과하면 열반에 이른다고 함

이 구멍의 크기가 대불의 콧구멍 크기와 같다네요




대불전 바깥에 불상으로 설명판을 안읽었어요 ㅠ

(다른 사찰에도 더러 있어요)



무슨 위령탑인데


니가츠도(二月堂) 입구로 시주한 석등과 표석이 줄지어져 있어요

시주한 금액에 따라 크기가 달라요



이월당


오미즈야(御水舍)

여기에도 닭 그림이 있는데 무슨 의미인지?

이월당에서 내려다 본 나라 시내

이월당 뒤에도 시주 표석으로 둘러쌓여 있어요

동대사에서 가장 먼저 748년 완공된 삼월당(법화당)

이 안에 동대사 창건자이자 초대 주지인 료벤 스님 목상이 있음


어김없이 신사가

길옆에도 작은 신사가

동대사에서 카스가다이샤(春日大社) 가는 길


카스가다이샤(春日大社)

일본의 3대 신사중 하나로 710년 후지와라 가문이 세웠으나 7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김

일본의 토속 종교인 신토(神道) 신앙에는 정결과 경신을 유지하기 위해

20년마다 건물을 허물고 그대로 복원하는 전통이 있음

여기도 710년 최초 건물이 완성된 후 50여 차례나 이런 과정을 되풀이 해와

현재의 건물은 1863년 재건된 것임(여행 안내 책자)



금년(平成 30년 2018)이 창건 1250년이라는 팻말



신사 입구에 작은 신사가 있네요


여기에도 시주받은 석등이 줄줄이

(오래되어 이끼낀 모습이 보기는 좋네요)


여기에도 결혼 사진(실례!)

회랑의 등롱이 1,000개가 넘는다네요



호류지(法隆寺)

아스카 시대의 모습을 현재까지 전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31대 요메이(用明)천황이 자신의 병 치유를 기원 할 사찰과 불상을 만들도록 하였으나 실현을 못보고 죽자

33대 스이고(推古)천황과 요메이 천황의 아들인 성덕태자가  유원을 받들어

쓰이고 15년(607년)에 사찰과 약사여래상을 조성한 것이 법륭사(斑鳩寺 이카루가노데라)임

현재 법륭사는 콘도(金堂)을 중심으로한 西院伽藍과

유메도노(夢殿)을 중심으로 한 東院伽藍으로 나누어져 있음

아스카시대를 시작으로 각 시대 형태의 건축물이 모여 있고 많은 보물들이 전래되고 있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세계적인 불교문화의 보고임(법륭사 팜프렛)

670년 화재후 708년 중건하고 이 후 수차례 보수하며 초기의 고구려,백제,신라를 닮은 건축 양식이 일본화 함

금당에 봉안된 석가여래삼존상은 632년 백제계의 佛母匠 鞍作止利가 제작

금당에 고구려 담징 스님이 그렸다는 벽화가 있었으나

1949년 화재로 손상된 것을 1968년 모사하여 별도 보관한다고 함

(담징 스님의 일본 활동 년대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음)

법륭사의 금당 벽화는 중국의 운강석불,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으로 불리고 있음




법륭사 남대문(무로마치 시대 1438년 재건)


우리나라 토담과 비슷함


대강당,종루(平安시대) 국보

회랑(아스카 시대)과 경장(경전 서고 奈良시대) 국보

금당과 오층탑(석가의 사리를 보관) 아스카 시대 국보

오층탑은 몇번의 보수를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제 5층탑(34m)으로

백제 기술자가 건립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비슷함)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인터넷에서 퍼옴)


聖靈院(성덕태자상을 안치) 가마쿠라 시대


백제관음당

볍륭사에 전하는 백제관음상(아스카 시대)은 일본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

특히 일본의 불상에서는 드믄 팔등신의 날씬한 모습과 아름답고 자비스러운 표정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법륭사 팜프렛)

백제 관음상은 백제 성왕이 보낸 것이라고 함

1998년에 백제관음당을 신축하여 백제관음상을 모심(비공개인지 못봤어요) 



백제관음상

인터넷에서 퍼오기가 안돼 PC모니터에서 촬영했더니 사진이 좀



동대문(나라 시대)


동원가람 사각문(四脚門)

동원가람 종루,회랑(가마쿠라 시대)

동원가람 繪殿(성대태자의 일대기의 그림 안치),

사리전(성덕태자가 두살 때 합장하던 손바닥으로 부터 나왔다는 사리를 안치함)

가마쿠라 시대

동원가람 夢殿(739년 나라시대) 국보

성덕태자가 명상을 하고 경전을 공부하던 곳으로

꿈에 보살이 나타나 경전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는 것에 유래함


중궁사

성덕태자의 어머니인 아나호베노하시히토(穴穗部間人)황후의 뜻을 받들어 창건

여기에 봉안된 보살반가상(如意輪觀世音菩薩 국보)은 아스카 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일본 미술사상  결코 뺄수 없는 작품이다

국제미술사학자들은 이 상의 얼굴의 아름다움은 "고전적미소"의 전형이라고 높게 평가해서

이집트의 스핑크스,래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함께 세계 3대 미소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궁사 팜프렛) (그냥 지나쳤어요 ㅠㅠ)




인터넷에서 검색후 PC모니터에서 촬영


햇빛 쐬려 옹기종기 모여있는 자라

절을 물위에 세웠네요


아스카(飛鳥)

한반도의 각 지역에서 출발한 진출자(도래인)들은 출항지와 항해 조건 정치,군사적 능력에 따라

규슈 북부와 서부 지역,동해와 접한 이즈모(出雲)와 그 위의 쓰루가(敦賀) 지역 등 여러 곳에 도착함

이들은 그 지역의 선점자들이나 토착민들과 갈등을 벌이거나 타협을 하면서 새로운 땅을 개척해나감

그들 중 일부가 내륙으로 전진하다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이고

들판이 펼쳐진 아늑하고 낯익은 곳을 발견하고 정착을 한다

이렇게 해서 아스카의 역사가 시작되고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일본 고대 국가 성립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른바 아스카시대의 개막으로 스이코(推古)조를 전후한 시기로 6세기말에서 7세기 중엽으로

불교가 들어와 정착하고 친 백제계의 소가우지(蘇我氏)가 집권하던 시대이다

아스카는 "飛鳥",明日香","阿須加(아수가)" 등으로 기록되며

아스카의 유래인 "安宿"은 한반도에서 온 진출자들이 정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아스카 시대의 특징은

1. 불교의 공인과 발달

2.정치 질서 확립과 律令政治의 시작

3, 문화의 발달과 국제성

이 시기는 정치,경제,사회가 대혁명을 이룬 야마토 국가가 귀족의 연합 정권에서

천황제 율령국가로 비약한 일본 국가 성립의 시대이다

이때의 수입 문화는 주로 한반도에서 대량으로 건너간 진출자 집단에 의해 전수되고 완성됨

정치,기술 등 사회문화와 불교와 미술 등 종교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진출자 집단은 기술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이룸

역사,양잠,복장,도예,야금,직조,양조,提防,水利,조선 등 각 분야를 전수

또 불교문화의 발달에는 승려,사찰 건립과 불상 조성에 참여하는 기술자들이 대거 들어옴에 기인함

불교를 매개로 한 백제의 진출은 6세기 후반에 더욱 본격적으로 되어

야마토 조정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함

일본에 불교 전래는 552년과 538년 설 두가지가 있으나 모두 백제로 부터 전래됨

(일본속의 한민족사 2002년 조선일보사 발간 참조)

일본서기에 보면 30대 민다쓰(敏達 백제계로 알려져 있음)천황 6년(577년)

백제에 갔던 사신들이 백제왕이 보낸 經論,律師,禪師,비구니,呪禁師,造佛工,造寺工 등과 함께 귀국했다고 함

스이고(推古)천황 5년(598년) 백제의 阿佐太子가 방일해서 불교를 전래함


* 야마토(大和)정권

3세기말에서 4세기초에 세토내해(瀨戶內海) 연안으로부터 기나이(畿內)에 걸친

야마토(大和 교토,오사카,나라,아스카)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으로

외국(한반도,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강력한 국력으로 각 지역 정권을 압도하며

국내 지배 체제를 구축함




아스카 아마카시노오카(甘樫丘)

해발 145m의 나즈막한 언덕으로 아스카 마을 중앙부에 위치해 전망대에서 일대를 내려다 볼 수 있음



백제땅과 닮았다는 이스카 마을


아스카데라(飛鳥寺)

일본서기에 의하면 崇竣천황 1년(588년)에 蘇我馬子(백제계)가 계획해서

동5년(592년)에 불당(金堂)과 회랑을 완성하고

스이고천황 1년(593년)~4년(596년)에 탑을 완공

동 13년~14년(605~606년)에 금동丈六불상을 조성하여 안치함

일본 최고(最古)의 사찰로

사찰의 건설에는 많은 박사와 工人들이 한반도에서 건너와서 이루었다고 기록됨(비조사 안내판)

일본 사학자들이 1956~1977년에 비조사 유적 발굴 결과

가람의 건축 양식은 평양 교외 淸岩里 사찰터의 "3금당 형식"과 그 근처 上五里 사찰터와 닮은

고구려 양식의 사찰이었다고 밝힘

710년 平安조 궁이 나라로 천도하며 폐허가 됨




현재는 작은 불당(金堂) 하나만 있음



飛鳥大佛로 불리는 석가여래상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동불상으로 너무 많이 손상되어 얼굴과 손만 당시의 것이라고 함 


직물로 짠 석가여래좌상


여기는 대불 개안(창건)이 608년으로 써 있네요

창건 당시 초석이 몇개 남아 있네요


아스카 석물(亀形석조물)

일본서기에 齊明천황 2년 항목에 기록된 "궁 동쪽 산의 돌담"에 부합하는 유적으로

2000년에 발굴 조사로  거북형 돌통을 중심으로 導水시설과 돌바닥,돌담,돌계단 등이 발견되었음

湧水시설(샘물)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목통으로 전달되어 거북형 돌통으로 들어가고

등에 있는 물통에 넘치도록 하는 구조임

물의 흐름을 보는 것을 즐기는 시설은 아닌 것 같아 천황 제사와 관련된 장소로 보고 있음





酒船石

길이 5.5m,폭 2.3m,두께 약 1m의 화강암으로  일부가 결손되어

근세에 어딘가로 부터 운반된 것으로 생각된다

술을 짜거나 기름이나 약을 만든 도구로 추정되기도 하고

토관이나 돌통을 연결하여 물을 끌여들이는 정원 시설이라는 설도 있음(1927년 사적 지정)






이시부타이(石舞台) 고분

일본에서 가장 큰 方形(또는 上圓下方形) 고분으로 위에 얹은 돌의 무게만 2,300톤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임

오래전부터 석실을 덮었던 성토가 소실되어 거대한 천정석이 노출되어 있어 石舞台라고 불리움(안내판)

2002년 조선일보사에서 출판된 "일본속의 한민족사"에 의하면

아스카 고분들 가운데 가장 신비함을 간직하고 피장자의 신분을 모르나 당시 세력가였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년)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음

불교의 수용을 놓고 친황실계이며 백제계로 추정되는 소가우지(蘇我氏)가 반대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587년 불교를 공인받으며 막강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함

그러나 왕권을 확립하려는 왕실과의 갈등으로 645년 大化改新이 일어나며 소가우지는 몰락한다

고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고 왕릉보다 더 거대한 고분을 축조할 능력을 가졌으나

결국 역사 무대에서 전면적으로 퇴장한 소가우지의 운명을 나타낸 것이 석무대고분으로 보인다 


석무대고분앞에 조성된 공원







석무대고분 석실



석무대고분 석관뚜껑으로 추정


다치바나사(橘寺 귤사)

성덕태자가 태어난 곳으로 당시에는 귤의 궁(橘의 宮)이라는 欽明천황의 별궁이었음

태자는 대단히 깊게 불법을 신앙으로 하여 자신이 불전을 강의하고 주석을 붙인 것이 현존하는 三經義疏임

스이고천황 14년(606년) 천황의 요청으로 勝鬘經(승만경)을 3일에 걸쳐 강의를 한다

그 때 연꽃이 정원에 1m나 내려쌓이고(蓮華塚) 남쪽 산에 천개의 불두(佛頭)가 나타나 광채를 발하고(佛頭山)

태자의 관으로 부터 해,달,별(日月星)의 빛이 번쩍이는(三光石)  등 불가사의한 일이 나타나

천황이 놀라서 이 땅에 사찰을 세우도록하여 태자가 어전을 개조하여 조성한 것이 橘樹寺이다

성덕태자가 건립한 7대 사찰 중 하나임

이후 수 차례 화재로 소실돼 현재건물은 에도시대 말기(1864년)에 재건한 것임 


귤사(橘寺) 명칭의 유래

일본서기에 의하면 11대 垂仁천황 시절 칙명을 받아 "토코요"국(중국 운남성)에 불로장수의 약을 구하려 갔던

田道間守가 10년의 긴 고생 끝에 간신히 비약을 찾아 귀국하니 천황은 이미 죽었음

그 때 그가 가져온 씨앗을 모종해서 싹 틔운 것이 귤(밀감의 원종)이고

그 때부터 여기를 귤이라고 불리워진다고 함

그는 또 흑사탕을 가지고와서 귤과 함께 약으로 사용해서

후에 밀감,약,과자의 祖神으로 숭상되어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과자집의 상호에 橘屋이 많이 쓰이는 유래임(다치바나사 팜프렛)



성덕태자의 애마인 흑마상으로 하늘을 날아 달마대사의 화신으로 전해짐

계단을 이용해 만든 우산꽂이

이면석(二面石)

아스카시대의 석조물로 사람 마음의 선악의 양면을 표현한다고 함

사찰안에 신사


질서 정연한 시주 표석

염불 사경 연수 도장으로 사용하는 住生院



여기는 천태종이네요

성덕태자가 불경을 강의할 때 日,月,星의 빛을 냈다는 三光石


오미즈야(御水舍)


성덕태자(聖德太子 574~622)

일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 인물로 아스카문화의 중심에 있으며

스이고(推古)천황 치세에서 섭정을 맡아 당시의 세력가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협력하여 정치를 행함

당시의 국제적인 긴장속에 수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견수사)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12계의 관위와 17개조의 율령을 제정하는 등 정치 체계를 확립함

독실한 불교 신자로 일본에 불교를 보급시켜 융성 시키고 "법화경","유마경" 등을 주석하여 "三經義疏"를 지음

불교를 원형 그대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일본의 토착 종교인 神道와 유교의 좋은 점을 모아 재탄생 시킴

외래의 좋은 점을 자국 문화와 융합하는 일본인의 신불유습합(神佛儒習合) 사상은

성덕태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덕태자는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보고 있음

백제계의 실력자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의 두 딸이 29대 겐메이(欽明)천황에게 시집을 가서

각각 31대 요메이(用明)천황과 아나호베노 하시히도(穴穗部人)을 낳아

두 사람(이복 남매)이 결혼해서 성덕태자를 낳음

당시의 최고 권력자였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는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로 두 누나가 왕후가 되어

요메이천황이 조카이고 성덕태자는손자뻘이며  딸을 성덕태자비로 보내 사위가 된다 

33대 스이고(推古)천황은 요메이천황과 동복 남매이며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가 되고

이복 남매인 인 30대 민다쓰(敏達)천황의 왕후로 성덕태자의 고모및 백모가 된다

32대 스슌(崇峻)천황은 요메이천황의 이복 동생(성덕태자의 엄마와 친남매)으로

소가우지(蘇我氏)가 추대하였으나 왕권 강화로 대립을 하자

5년만에 암살하고 스이고천황을 추대함(당시 소가우지(蘇我氏)가 막강한 세력이었음을 보여줌)


(인터넷에서 퍼오기가 안돼 PC 모니터에서 촬영) 

일본 제실박물관(현 나라박물관 구관)에 소장된 성덕태자 초상화는 백제 성왕의 손자(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572~645년)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원래는 법륭사에 걸려 있었다고 함

1949년 법륭사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후대에 모사한 것임

이 아좌태자 초상이 만엔권 지폐에 새겨졌으나 1984년 일본이 우경화되면서

"역사적 실존성이 분명하지 않다"라는 이유로 다른 인물로 교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