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인

2021. 2. 14. 11:54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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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

Sumerian

 

  1. 5000년을 이어 온 현대 문명의 뿌리
  2. 구약성경의 모태가 된 수메르 신화
  3. 수레바퀴와 방패벽 전술, 최강의 수메르 부대
  4. 민주정에서 왕정으로
  5. 소금이 불러온 수메르의 몰락

흔히 ‘초고대문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같은 거대 건축물로 유명한 이집트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집트보다 더 앞서서 문명을 이룩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수메르인(Sumerian)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의 ‘메소포타미아’란 말로 불렀는데, 이 지역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 태어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7300년 전, 이라크 남부의 알-우바이드(al-Ubaid) 지역에서 도기와 구리 그리고 각종 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만들어졌다. 이 우바이드 문명은 기원전 4000년경 기후변화로 인해 쇠퇴했으며, 그 이후 메소포타미아 바깥에 살던 수메르인들이 들어왔다.

5000년을 이어 온 현대 문명의 뿌리

수메르인들의 진짜 고향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이란이나 터키 지역에서 이주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리고 수메르인들이 남긴 점토판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수메르인들은 검은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다.

수메르인들의 외모를 묘사한 인형

수메르인들은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지녔으며, 수염을 깎지 않고 길게 길렀다. 고대 중동에서는 수염에 남자의 힘이 담겨 있다고 믿고 수염을 가급적 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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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수메르인들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기원전 3300년 무렵 우룩(Uruk)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국가들을 건설하면서 문명의 싹을 틔웠다.

수메르의 고대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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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가 위치했던 일명 ‘비옥한 초승달’ 지역

이곳은 토양이 매우 비옥하여 풍부한 농업 생산량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꽃피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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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인들의 사회구조는 현재와 비교해도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달리 말하면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인류 사회의 뼈대는 그 본질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수메르인들은 세계 최초의 성문법을 만들었다. 역사상 최초의 성문법은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보다 훨씬 앞서 수메르인들이 만들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수메르인들이 만든 법전을 그대로 모방한 것에 불과했다.

수메르의 법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 거지와 노동자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걷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 다치면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메르에는 조세 징수원, 농부, 어부, 도축업자, 제빵 기술자, 의사, 목동, 음악가, 교사, 군인, 성직자, 목수, 금속 기술자, 서기관 등 지금과 같은 다양한 전문 직업이 존재했다. 수메르의 조세 징수원들은 처음에는 곡식을 세금으로 받다가, 점차 은을 화폐로 사용하게 되면서 은을 세금으로 걷었다.

수메르에서 특히 존중받은 직업은 문자로 기록을 남기는 서기관이었다. 수메르 시대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어서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글자를 새겼다. 서기는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출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이었다. 힘든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고도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고, 사회 상류층들에게도 존중을 받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메르인들은 진흙 점토판에 새기는 최초의 문자를 개발하기도 했다. 최초의 수메르 문자는 뜻을 그림으로 나타낸 상형문자였다가, 나중에는 못처럼 뾰족하게 생긴 설형문자로 바뀌어 갔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복잡한 뜻을 일일이 상형문자로 표시하기 어려워져, 간단한 형태의 설형문자로 변해 간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의 모태가 된 수메르 신화

고대 사회의 문화는 대부분 종교에서 비롯되었다. 수메르인들은 하늘의 신인 아누와 풍요의 신 두무지, 사랑과 수확의 여신 이난나 등 여러 신들을 믿었다. 그중에서 가장 열렬히 숭배했던 신은 두무지와 이난나였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찬란한 문명의 원동력이 풍성한 농업 생산력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농업을 주관하는 두무지와 이난나를 높이 섬겼던 것이다.

수메르인들은 매년 겨울이 되면 두무지가 죽고, 그를 찾기 위해 이난나가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가 봄이 되면 두무지와 함께 돌아와 풍요로운 한 해를 약속한다고 믿었다. 이런 두무지-이난나 신화는 훗날 서쪽인 그리스로 전해져, 미소년 아도니스와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화로 변형되었다.

풍요를 숭배했던 수메르인들은 야릇한 풍습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매년 봄마다 이난나 여신을 섬기는 사원에서 남녀가 공개적으로 집단 성교를 했다. 이들은 남녀의 성행위가 아이를 낳듯이 그해의 풍성한 수확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매우 문란해 보이지만, 고대인들에게 섹스는 결코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었다.

수메르인들은 또한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신앙에서 찾기도 했다. 인류 최초의 영웅 설화인 ‘길가메시 전설’은 실제로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우르를 다스린 길가메시 왕을 다룬 이야기이다. 길가메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현자인 우트나쉬피팀을 찾아갔는데, 우트나쉬피팀의 입을 통해 태곳적에 있었던 대홍수 이야기를 듣는다. 놀라운 점은 우트나쉬피팀이 말하는 대홍수 설화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대홍수 설화의 구조와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다(신이 인류의 죄악에 분노하여 홍수로 세상을 쓸어 버리려고 하는데, 그중 착한 사람을 배에 태워 살려 주고, 나중에 그를 통해 새로운 인류를 일으킨다는 내용). 노아의 대홍수 설화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수메르 대홍수 설화를 유대인들이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길가메시 전설’에서 길가메시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영원한 생명을 주는 풀을 찾았으나, 목욕을 하러 물에 들어간 사이 뱀 한 마리가 와서 그 풀을 물고 달아나 버린다. 영생을 잃고 결국 죽을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길가메시는 크게 상심하고 우르로 돌아간다. 뱀이 인류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사악한 동물이라는 시각은 훗날 구약성경에서 뱀이 인류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했다는 내용과 비슷하다.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뱀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신비한 생물이라는 믿음이 중동 각지에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즐겨 마시는 술인 맥주도 유럽인들이 아닌, 수메르인들의 발명품이었다. 수메르인들은 보리를 재배했는데,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맥주를 일상에서 즐겨 마셨다. 단, 수메르인들이 마신 맥주는 맛과 농도가 지금보다 더 짙고 걸쭉하여 마치 죽과 같았다. 수메르인들은 현대인들처럼 맥주를 각자의 컵에 따라 마시는 방식이 아닌, 맥주가 담긴 항아리에 갈대로 만든 빨대를 넣고 여럿이 함께 빨아 마시는 방식을 선호했다.

수레바퀴와 방패벽 전술, 최강의 수메르 부대

다른 고대인들처럼 수메르인들도 그들의 문명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다. 수메르 군대는 어떻게 싸웠을까?

수메르인들은 인류 최초로 바퀴가 달린 수레를 만들었다. 현재처럼 바큇살이 여러 개 달린 형태가 아닌, 그저 둥근 탁자처럼 생긴 것이어서 빠른 속도로 달릴 수는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수메르인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말을 가축으로 길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수메르 군대에는 말을 탄 기마병이 없었다. 대신 야생 당나귀를 잡아 가축으로 삼고, 당나귀들이 끄는 수레를 전투용으로 사용했다. 수메르의 전차 부대는 한 명의 기수가 네 마리의 당나귀들을 부려 움직이고, 동시에 그 옆에 탄 전투원이 창을 던지며 싸우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당나귀는 말보다 체구가 작고 체력이 약해서 전투용으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때문에 학자들은 수메르 전차 부대가 신분이 높은 지휘관이 탑승하여 군대를 지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수메르 군대의 주력 부대는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싸우는 보병이었다. 수메르인이 활동했던 시기는 갑옷이 발명되기 전이어서 수메르 보병들은 갑옷을 착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양털로 짠 겉옷을 망토처럼 두른 뒤, 나무나 구리로 만든 투구와 방패를 착용하고, 오른손에 구리 촉 창날이 달린 창을 쥔 채로 동료 병사들과 밀집 대형을 이루는 거대한 ‘방패벽 전술’을 구사했다.

당나귀가 끄는 수레와 보병들을 묘사한 수메르의 유물. 일명 ‘우르의 군기(軍旗)’

ⓒ 서해문집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즉, 창과 방패를 든 보병들의 밀집 전술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이미 5000년 전의 수메르인들이 사용한 전법이었던 것이다. 방패벽 전술은 인류가 총과 대포 같은 화약 무기들을 발명해 전장에 도입하기 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사용된 전법이었다. 수메르 시대보다 4000년이나 지난 시기 유럽에서도 로마군과 게르만족 전사들은 모두 방패벽 전술로 맞서 싸웠다.

고대 전투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나 TV 드라마들을 보면, 먼저 장군이 연설을 한 다음, 병사들이 앞으로 몰려가서 서로 어지럽게 얽혀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러한 설정은 고대 전투의 실상과는 많이 다르다. 실제로 대부분의 고대 전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이룬 보병 무리가 서로 마주 보고 서서, 나팔 소리나 깃발의 움직임을 신호 삼아 서서히 전진한다. 그러다 거리가 좁혀지면 보병들끼리 방패를 맞대고 상대의 대오를 무너뜨리기 위해 밀어내기를 시도한다. 힘에서 밀린 어느 한쪽 대열이 무너지면, 그때부터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진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 전사들이 페르시아 대군과 싸울 때, 바로 앞에서 마주한 채 방패를 맞대고 밀쳐 내려 애쓰던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수메르 문명은 초기 청동기 시대로 분류된다. 수메르인들은 창이나 화살 같은 무기 끝에 구리로 만든 촉을 만들어 붙였지만, 구리 무기를 장만할 여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석기를 가공한 돌도끼나 나무 몽둥이를 무기로 들고 나갔을 것이다.

수메르 시대에는 도시를 공격하는 공성전이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다. 아직 뛰어난 공성 무기가 발명되기 전이어서, 대부분의 공성전은 그냥 도시를 포위한 상태에서 식량과 물자의 공급을 차단하고, 적이 굶주림에 지쳐 항복하기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민주정에서 왕정으로

초기 수메르인들은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누어져 있었고, 주민 투표를 통해 각 도시의 행정을 책임진 지도자를 선출했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면 새로운 투표로 다른 지도자를 뽑았다. 고대 그리스인들보다 1000년이나 먼저 민주주의를 사회제도로 채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2900년부터 수메르인들은 민주정에서 왕정으로 정치체제를 서서히 바꿔 나갔다. 투표로 선출된 지도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신 임기제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투표도 사라져 지도자들은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민중들 위에 서서 그들을 지배하는 절대 권력자인 왕으로 변질되어 갔다.

수메르인들이 왜 민주정을 버리고 왕정을 채택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수메르와 마찬가지로 공화정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제정으로 바꾼 로마처럼, 도시국가를 다스리던 지배층들 내부에서 서로 더 많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그 싸움의 결과 강고한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수메르 점토판에 이름이 보이는 최초의 왕은 엔메르카르(Enmerkar)이다. 그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난 기원전 2800년, 수메르 서북부 도시인 키시(Kish)의 13번째 왕 에타나(Etana)가 다른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잠시나마 전 수메르 지역을 통일했다.

하지만 수메르의 통일은 얼마 못 가 다시 내전이 시작되면서 끝났고, 키시, 우룩, 라가시 등 여러 도시국가들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유명한 길가메시도 기원전 2700년, 우룩을 다스리는 왕의 이름으로 점토판에 언급된다.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기원전 2600년경, 우룩의 성벽은 예전보다 더 크고 두텁게 증축되는데, 전쟁의 양상이 치열해지면서 도시 주민들이 성벽을 보강한 것이라고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2250년 수메르의 왕인 구데아의 흉상(루브르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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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불러온 수메르의 몰락

도시국가들끼리의 내분이 격화되면서 수메르의 세력이 약해지자 외부 세력들이 수메르를 넘보기 시작했다. 기원전 2530년, 지금의 이란 남서부에 살던 엘람족(Elam)은 수메르를 공격하여 80년 동안 수메르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그로부터 116년 후에는 키시 북부의 아카드인(Akkadian)들이 남하하여 엘람족을 그들의 고향으로 몰아내고 수메르를 점령했다.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Sargon, BC 2334~2279)은 현재의 시리아 동부에서 이라크 남부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위세를 떨쳤다.

기원전 2154년, 아카드 왕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격화되어 멸망했고, 71년 후에 수메르는 이라크 북동부 자그로스 산맥의 유목민인 구티족(Gutian)에게 약탈을 당했다. 큰 혼란에 휩싸인 수메르는 기원전 2047년, 다시 도시와 사원 등을 재건하여 부흥을 맞이하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를 ‘수메르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수메르의 부흥은 막을 내리고, 수메르 문명 자체가 소멸하게 된다. 연이은 외침에도 계속 살아남았던 수메르는 왜 사라졌던 것일까?

이유는 수메르 문명 자체에 내재되어 있던 결함 때문이었다. 수메르인들은 곡식을 생산하는 농지를 늘리기 위해 북쪽 산맥에 자라는 숲을 베어 냈는데, 숲이 사라지자 비만 오면 홍수가 나 농경지가 자주 물에 잠겼다. 원래 숲이 있던 산악 지역의 토지에는 소금기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소금기가 홍수를 타고 농경지에 쌓이게 되었다.

게다가 수메르인들은 농지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관개수로를 설치했는데, 관개수로에 흐르는 물에도 소금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 양은 매우 적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농경지에 쌓이는 소금기가 많아지고, 그런 현상이 약 1300년이나 계속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곡물들의 성장에 점차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소금기가 대지에 충적되었는지, 기원전 1700년 무렵에는 하얀 소금 성분들이 땅 표면에 그대로 드러나 사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울러 숲은 수분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토양의 건조화 현상을 막아 주는 역할도 하는데, 수메르인들은 그런 숲을 마구 베어 냈기 때문에 토양의 건조화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나친 소금기로 인해 곡식을 심어도 곡물이 자라지 않자 풀을 먹을 수 없게 된 가축들이 굶어 죽어 갔다. 그리고 수메르인들도 작황을 할 수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메소포타미아는 지나친 소금기로 인한 토지의 건조화 현상으로 황량한 땅으로 변해 갔으며, 수메르 문명도 인위적인 환경 파괴로 인해 자멸하고 말았다. 수메르 시대 이후로부터 약 1000년 동안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소금기를 걷는 작업을 하고 나서야 염화 현상은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쇠퇴해 가던 수메르 문명에 마지막 타격을 가한 것은 엘람인들이었다. 기원전 1940년, 엘람인들은 수메르의 도시국가인 우르(Ur)를 침략해,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 살육을 자행했다. 이 타격으로 수메르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엘람인들에게 노예로 끌려가거나 도시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기원전 18세기, 키시 서부의 도시국가인 바빌론을 다스리던 함무라비 대왕(Hammurabi, BC 1792~1750)은 수메르 전 지역을 정복하고 바빌론 왕국을 세웠으며, 수메르의 남은 잔존 세력을 모두 흡수했다. 이로써 1600년을 이어온 수메르 문명은 완전히 소멸했다.

하지만 수메르인들이 이룩한 문명의 성과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바퀴와 수레, 상형문자와 맥주, 법전과 공화정치, 영웅 신화와 창세 신화 등은 계속 후대로 전해져 오늘날 현대 문명에도 짙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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